<청춘 스케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초기 대표작으로, 텍사스 오스틴의 거리와 카페 기숙사와 같은 골목을 배경으로 수십 명의 인물이 무대 없이 교차하며 펼치는 24시간의 청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줄거리도, 명확한 주인공도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는 그 자체로 1990년대 미국 청춘들의 정서. 즉 무목적함과 자유에 대한 은밀한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인 인물, 구조 그리고 90년대 청춘 문화의 맥락을 중심으로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청춘의 무목적함이라는 구조 : 줄거리가 아닌 흐름으로 말하기
이 영화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명확한 주인공도 없고 갈등이나 반전도 없습니다. 하나의 장면이 끝나면 인물이 지나가고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반복의 연쇄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무언가를 해내야만 의미 있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서사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이 구조를 통하여 무목적함 그 자체가 청춘의 정체성일 수 있다는 주장을 보여줍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작가, 철학과 대학원생, 음악가, 무직자, 음모론자 등이고 이들은 저마다의 세계관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계속해서 어떤 상태로 존재하느냐입니다. 이러한 구성은 영화의 구조 자체가 일종의 성명서처럼 작동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도 이야기가 있다. 단지 그것이 완결된 사건이 아닐 뿐이다라는 말은 곧 당시 미국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던 젊은 세대의 자의식을 반영해서 보여줍니다.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다가 다음 인물을 자연스럽게 따라잡습니다. 컷 전환은 거의 없어 롱테이크로 연결되고 이는 이야기보다 인물의 흐름 및 존재를 더 강조하는 장치로 작동하게 됩니다. 청춘이란 결국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감정 상태라는 것, 링클레이터는 그 진실을 영화의 형태로 보여줍니다.
영화 구성 인물들의 자유로운 형태와 대사
이 영화의 백미는 대사입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철학적 사유나 음모론, 문학적 고찰, 정치적인 냉소, 심지어 일상적 넋두리까지 쉴 새 없이 떠듭니다. 이들의 대사는 때로는 허세에 가깝고 때로는 날카로운 진심을 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대사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청춘의 불안을 보여줍니다. 가령 한 인물은 세상을 지배하는 비밀조직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고, 또 다른 인물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어떤 이는 tv 뉴스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치와 예술, 소비주의의 한계를 비난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처음엔 의미 없는 헛소리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는 시대에 대한 반발과 자기 방어의 정서가 진하게 깔려 있습니다. 이 영화는 캐릭터 중심이 아닌 언어 중심으로 진행이 됩니다. 즉 인물의 역할이 아니라 그들의 말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카메라는 이들의 대사를 조용하게 받아들이고 따로 평가하지도 않고 정답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관객에게 이들 중 누가 진짜일지, 혹은 모두 진짜인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닐지 묻습니다. 이러한 영화 구성은 허세와 진심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청춘이라는 정체성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복합적인지를 드러냅니다. 인물들의 자유로운 형태와 대사는 곧 90년대 청춘들의 심리적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90년대 청춘 문화의 맥락과 영화의 의의
<청춘 스케치>는 1900년에 만들어졌지만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은 느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더 새롭고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나 사건이 아니라 청춘이라는 상태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언제나 무기력하고 불안하며 정의할 수 없지만 강렬하게 존재합니다. 이는 미국 독립영화계에 신선을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자 이후 등장하는 제너레이션 X 영화의 초석이 되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청춘 영화가 아닌 이유는 그 당시 미국 사회가 마주한 세대적 무기력과 정치적 탈의미화를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냉전의 피로감이 이어지고 레이건 시대를 거치게 되면서 정치적 냉소주의가 짚어진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청춘은 더 이상 사회를 바꾸겠다는 거대한 이상을 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바꾸지 않아도 되는 세계 속에서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슬래커는 바로 그 세대의 상징이었습니다. 직업도 방향성도, 확신도 없는 청년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냉소적이며 사회를 읽는 민감한 안테나를 지닌 존재였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게으름뱅이 같지만 실은 자기만의 철학과 세계를 품고 있는 이들을 통해 90년대 청춘의 정체성을 재정의합니다. 영화 속 청년들은 누구 하나 주인공처럼 부각되지 않으며 1:1의 비중으로 차례차례 등장하고 사라집니다. 마치 한 도시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따라가는 듯한 구조는 청춘이라는 시기 자체가 하나의 일시적인 흐름이라는 메타포처럼 작용합니다. 더불어 <청춘 스케치>는 MTV적 감각이나 할리우드식 감정의 과잉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청춘의 일상성과 산만함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이는 동시대의 또 다른 청춘 영화들과 완전하게 대비됩니다. 오히려 세대를 관통하는 정직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